군용 담배의 대명사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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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꼬부기 작성일 10-05-24 16:16 조회 2,08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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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 담배의 대명사 ‘화랑’
신라시대 화랑의 국가주의 정신을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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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단종되었지만 군용 담배의 대명사 하면 바로 '화랑'입니다.

눈물, 콧물은 물론 진한 애증이 베어나는 '화랑'은 1949년 '샛별, 탑, 백합' 등과 함께 군용으로 공급되었지만 가장 오랫동안 애용한 담배는 '화랑'이었습니다. '화랑'이란 이름은 신라 시대 화랑의 국가주의 정신을 본받자는 의미로 작명되었을 것입니다. 심신을 단련해서 교양을 쌓고 국난을 당하면 선봉에 서는 용감성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과연 화랑이 이처럼 숭고하고 애국적이었을까요?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화랑은 군사집단이라거나 심신수련 단체가 아니라 「삼국사기」에서 언급 한 것처럼 당시 인재 선발의 한 제도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듯싶습니다. 화랑이 애국주의의 대명사로로 불리게 된 것은 7세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삼국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문이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고 했듯이 화랑 출신 중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자가 전쟁터에서 크게 활약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의 군대는 화랑만이, 또는 화랑출신자들은 모두 용감하고 훌륭한 전투적인 군인이었다고 하기는 무리입니다.

원광법사가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화랑에게 가르쳤다는 기록도 허구입니다.

「삼국사기」열전 귀산전에 등장하는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원광법사와 세속오계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 그 내용이 '세속오계'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화랑이었다거나 하다못해 화랑을 따라다닌 낭도였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또한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는 세속오계는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계율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살생유택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가려 죽이라는 뜻으로 원광법사가 설명한 것이 아니라 동물을 그 대상물로 삼았으며 부려먹을 수 있는 가축이나 고기 한점 되지도 않는 작은 짐승을 죽이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임전무퇴도 마찬가지 입니다. 군인들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당연한 의무라서 오직 신라에만 있었다고 불 수 도 없으며, 실재로 백제사를 쓴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화랑을 애국심으로 치장해서 나라에 충성하는 이미지로 만든 것은 후세의 창작물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신채호가 항일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민족 고유의 '낭가 정신'을 강조하면서 화랑을 부각시켰습니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대통령 이승만은 청년들의 애국심이 필요하다며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이었던 역사학자 이선근에게 한국사에서 청년문화 유산을 발굴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이 명령을 따른 이선근은 1954년 「화랑도 연구」란 책을 펴냈는데 이순신은 물론 독립협회, 갑오농민전쟁, 3·1항일 투쟁까지 모두 화랑정신을 빛낸 사건이라고 주장을 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박정희는 분단 조국에서 청소년들의 애국심과 상무정신을 심어준다고 하면서 화랑에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고 성역화를 실시했습니다. 학도 호국단을 만들면서 화랑의 후예라고 교육시켰으며 사관학교 연병장을 화랑대, 군인들이 피우는 담배 이름까지 화랑을 집어넣었습니다.

화랑은 부모의 계급으로 자식의 미래가 결정되었던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 귀족들끼리 관료 선발권을 독점하기 위해 만든 폐쇄적인 단체였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처럼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길이길이 받들기에는 개운치가 않습니다. 신라 시대의 화랑은 통치자들의 지배 이념으로 덧칠된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가치중립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합니다.

화랑 만큼이나 사연도 복잡한 '화랑' 담배는 87년 6월 항쟁에서 '넥타이 부대'였던 애연가들에게 달콤한 군대의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쓴 서러움이 가장 많이 묻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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