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를 수직으로 엮는 든든한 밧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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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꼬부기 작성일 10-05-24 16:36 조회 1,64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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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를 수직으로 엮는 든든한 밧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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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우리 가락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경기 아리랑」입니다. 남북한은 물론 해외 동포들의 모임에서 항상 뒷풀이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맞잡고 부르는 대표적인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랑은 대략 확인된 곡만 50여 종 2천여 곡으로 농부에서부터 광부·어부는 물론 도시의 빈민까지 독자성에 따라 여러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겨운 노동요가 되고 흥겨운 놀이의 추임새가 되었다가 이별의 노래, 망향과 망국의 설움을 달래는 노래로 불려지는가 하면 결속과 의지를 나타내는 투쟁의 노래로 애창되기도 합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 흩어져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서글픈 심정을 가장 솔직하게 담고 있어서 민족적 공감대 형성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독립군 아리랑」, 「경기 아리랑」, 「정선 아리랑」, 「진도 아리랑」,「밀양 아리랑」등이 대표적입니다.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문헌은 없습니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음성적 유사성을 띤 말이 굳어져서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여기에는 수 십 가지의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강제로 동원된 백성들이 고향의 처자식을 그리워하면서 '아리랑(我離娘)-나는 임을 이별하네라는 뜻'이라고 노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채록(採錄)된 아리랑의 내용이 대체로 연애와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곡조가 현대적인 점을 들어서 개화기 시대 전후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가사가 반복되고 그 다음에는 여러가지 상황에 맞게 즉석에서 가사를 지어 부르는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3박자 리듬을 변형시켜 쉬운 멜로디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마음대로 개사를 할 수 있어서 우리 민족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10년과 세도가인 안동 김씨의 몰락 등 혼란한 정국과 변천하는 사회상 및 내정․외교의 중요한 사건을 거의 시대 순으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어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면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놓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 타령'이라고 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런 놀이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대궐을 침입하면서 없어졌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1883년부터 1894년 사이에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노래가 ‘아리랑 타령’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종이 들었다는 ‘아리랑 타령’은 어떤 곡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경기 아리랑」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리랑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항일 영화의 효시라고도 하며 한국 영화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춘사 나운규의 1926년 개봉작 「아리랑」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랑」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던 민족의 상황을 영진이라는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정신병자만이 가능했던, 일본권력으로 상징되는 순사에게 조롱과 구타 뿐만 아니라 앞잡이 살해라는 상징적인 상황설정으로 시대의 아픔을 훌륭하게 형상화 시킨 작품입니다. 또한 영희를 겁탈하려는 기호를 살해하기 직전의 환상 장면과 살인의 몽타주 기법 등은 나운규의 천재성을 맘껏 살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출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진이 오랏줄에 묶여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데 거기서 흐느끼듯이 구성지게 부른 아리랑은 관객을 모두 울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영진이 부른 아리랑이 바로 지금의「경기 아리랑」인데 연구 자료를 보면 작품을 위해서 새로 작곡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즐겨 부른 노래를 삽입했다고 합니다. 영화가 엄청난 히트를 하면서 「경기 아리랑」도 널리 유행했는데요. 아마도 이때부터 아리랑을 노래하면서 강한 민족적 감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지역의 노래에서 민중의 노래로 불리웠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의 노래로 다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아리랑이란 단어가 담배 이름으로 쓰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세태라고 봅니다. 1958년 1월 최초의 필터 담배로 탄생해서 담배의 고급화를 이루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1976년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판매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 3월 1일 화려하게 리-디자인(re-design)되어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아리랑'은 전통과 현대를 수직으로 엮는 든든한 밧줄로서 우리 곁에 나란히 호흡하고 있습니다.

2007년 정해년은 흡연자들이 명랑하게 끽연을 할 수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회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꼭 소원성취하시길 바랍니다.

<글. 프리존 명예기자 plug10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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