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 상징한 담배 ‘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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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꼬부기 작성일 10-05-24 16:40 조회 2,42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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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뻗은 길 끝에는 산업화의 결정체
‘새마을 운동’ 상징한 담배 ‘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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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치적 중의 하나가 '새마을 운동'입니다. 경제 개발과 더불어 농촌 근대화 운동의 표본적 사례라고 합니다.

박정희는 “겨울철 농한기에 나태와 안일에 빠져 음주나 도박으로 소일하는 퇴폐적인 풍조를 없애기 위해서 대대적인 환경 개선 사업”으로 새마을 운동을 추진했다고 「민족중흥의 길」에서 밝혔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 농촌 잘 살기 운동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그러나 중앙일보 특별 취재팀의 「실록 박정희」를 보면 “쌍용양회가 시멘트 생산과잉으로 재고처리에 어려움을 겪자 박 전대통령의 지시로 정부가 구입해 전국에 무료로 지급”한 것이 태동의 배경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도 “김성곤 의원(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소유한 쌍용양회가 시멘트 과잉 재고로 자금난을 호소하자 박 전대통령이 지지부진한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하면서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원래 박정희는 민족성 개조운동으로 새마을 운동을 주창했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개선 사업이나 경제활동 등은 정신 개혁운동을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공화국 때 외무부 장관을 지낸 이동원씨는 “박대통령이 '이렇게 게으르고 단결심이 없어서야 어떻게 일본을 이기겠는가'라고 개탄을 하면서 인간성 개조 운동의 일환으로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의 3대 정신으로 내세운 것이 '근면, 자조, 협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박정희의 작품이 아닙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당시 혁명적인 항일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조선 좌익계열의 농촌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서 농촌진흥운동을 벌이면서 내세웠던 '근검, 자립, 협동'과 단 두 글자만 틀릴 뿐 내용까지 똑같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농촌의 피폐 원인을 자신들이 저지른 식민지 초과수탈이 아니라 농민들의 나태에 있다고 하면서 정신 개혁 운동을 벌였습니다.

박정희도 수출 주도형 산업을 이끌면서 가격경쟁력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생필품을 싼값에 공급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농촌 경제가 몰락하자 그 책임을 정책 실패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농민들의 나태와 정신적 해이에서 찾았습니다. 즉 잘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촌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지지기반 확보 프로젝트로 그러니까 10월 유신과 영구 집권에 필요한 대중 동원을 위해서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사 최대·최장의 국가 주도 대중운동이었으며 도시와 공장 등 한반도 구석구석을 휩쓸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크고 방대한 나머지 총체적인 판단이 어렵지만 비록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에 농촌 인구는 반으로 줄었으며 농가 부채는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공장의 노동력은 농촌에서 공급했으며 기술 부족은 가격 경쟁력으로 메워서 물건을 팔아야 했으므로 저임금을 강요당했습니다. 여기다가 농촌의 생산물은 제값을 받기는커녕 물가안정이란 명목으로 최소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농촌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한 희생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촌 특유의 정서는 사라지고 싸구려 도시 문화가 이식되면서 삭막해진 것은 부인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농촌 근대화란 명목으로 전통 문화는 한순간에 시멘트 속으로 파묻히거나 파괴되었습니다.

담배 이름만큼 우리나라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상품도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새마을' 담배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담뱃갑 중앙의 초록색 잎사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곧장 뻗은 도로의 양편으로 잘 정리된 논이 놓였으며 도로의 끝에 산업화의 결정체가 있습니다.

제3공화국의 '위대한 업적'인 새마을 운동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어서 '새마을' 담배는 1988년 12월 단종될 때까지 농촌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도로를 통해 땀 흘려 가꾼 농산물은 헐값에 팔려나갔고 농촌의 젊은이들은 불나방처럼 그 도로를 따라 도시의 불빛을 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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