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들어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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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꼬부기 작성일 10-05-24 16:05 조회 2,83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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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들어왔을까요?
우리나라 근대 담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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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쓴 표류기의 내용에는 “조선이란 나라에서는 네살이나 다섯살 쯤 된 아이들이 담배를 즐겨 피우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이들이 담배를 피운 것이 아니라 회충 때문에 발생하는 배앓이를 치료하느라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담배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들어왔을까요?
인조실록을 보면 광해군 8년과 9년 사이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고 Tm여 있습니다.광해군은 담배를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 어전회의 때나 궁궐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것이 일반인들 사이에 퍼져 어른이나 상전 앞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관습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담배 예절에 관한 일반적인 설입니다.
흡연에 비교적 관대한 유럽이나 미국의 사회에서는 흡연을 자연스런 개인의 기호행동으로 인식하고 청소년 흡연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맘대로 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귓밑머리가 허연 노인들 앞에서 젊은이가 길쭉한 시거를 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왠지 불쾌감을 느끼는 것을 보면 저도 유교의 윤리덕목이 몸에 밴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담배의 ‘Made in Korea’제품은 1945년 9월 미군정청에서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제조 발매한 ‘승리’였습니다.
길이 6Cm로 막궐련 열개비가 한갑으로 포장되어서 3원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이 담배의 갑은 당시의 시대상을 단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서 관련 자료를 처음 봤을 때 쓴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면에는 빨강색의 사각선 내에 파란 글씨로 '승리'라는 담배 이름이 Tm여 있고 발매처가 조선 군정청 전매국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가 3원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가 하면 뒷면에는 광복을 기념하는 특별판이라는 영문 내용이 들어있고 옆면에는 3원이라고 일본어로 가격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한글, 영어, 한문, 일어를 함께 쓴 잡다함과 이런 식으로 표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복 무렵에는 일본제 흥아, 그린, 피존 등이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배였으나 승리가 발매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지만 아직도 일반인들은 ‘풍년초’라 불리는 봉지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풍년초는 잎담배를 잘게 썰어 봉지에 담아서 파는 담배로 곰방대에 넣어서 피우거나 얇고 누런 색깔로 된 풍년초용 종이를 따로 사서 말아 피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라서 신문지나 다른 종이를 대신 사용했는데 특히 사전용 얇은 종이가 담배를 말아 피우기에는 제격이어서 아들이나 손자가 학생인 가정에서는 사전을 찢어내 담배종이로 사용하는 할아버지, 아버지 때문에 심심찮게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승리는 고급담배로 신분의 상징처럼 피워 물고 으스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누런 종이포대 속지로 말아 피우던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라서 풍년초용 종이로 피우는 것만으로 부러움을 살 때였는데 네모난 갑 속에서 몸체가 하얀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댕기는 모습은 확실히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담배 맛은 풍년초나 승리나 별만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1948년에는 미국산 담뱃잎으로 만든 ‘백구’라는 고급담배가 출시되면서 부유층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가 재정의 70%를 담배 수입이 담당했던 때라서 국무회의 석상에서는 우리나라 담배를 피우자고 결의를 했다고 합니다. 비록 미국산 담뱃잎으로 만든 백구 담배였지만 외국산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국산담배 애용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해방후 나라살림은 담뱃갑을 만들 정도로 종이 사정이 좋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승리는 기념 담배라서 포장이 되어 나왔지만 그 이후에 나온 공작이나 무궁화 등은 낱개비를 종이띠에 묶어 팔았습니다.
가격은 포장지 인쇄가 끝나면 바로 오를 정도로 변동 폭이 심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요동을 치기 시작했는데 전쟁 직후에 5백원이었던 ‘백구’ 담배는 그 이듬해 2천5백원까지 올랐으며 ‘공작’은 3백원에서 3천원까지 뛰었습니다. 결국 포장지에 가격인쇄를 하던 일은 중단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부터는 아예 가격을 표지하지 않았습니다.
1958년 우리나라 최초로 필터 담배인 ‘아리랑’이 개발되었으며 195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잎담배가 서독으로 첫 수출 되었습니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담배 이름까지 작명했는데 '파고다'였습니다. 파고다 공원은 일제 강점기때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역사적인 곳인데 일본군인 출신이었던 그가 왜 담배 이름을 파고다로 지었는지 아리송합니다.
1969년에 처음 선보인 ‘청자’는 1970년대 《노래는 추자, 담배는 청자》라는 새로운 문화코드를 만들었습니다. 현란한 몸놀림과 특유의 가창력으로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김추자의 노래와 담배 판매상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청자 담배는 독재시대의 암울한 사회에서 삶의 위안이 되는 한줄기의 빛이었습니다.
이후 한산도, 환희, 거북선 등 다양한 종류의 담배가 생산 판매되었습니다. 파이프용 담배인 하루방도 이 무렵 나왔습니다. 1980년대는 솔과 은하수가 출시되면서 품질개선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글. 프리존 명예기자 plug10님>

댓글목록 1

흡연자유인님의 댓글

흡연자유인 작성일

버스정류장 에서는 흡연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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