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이야기 -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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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꼬부기 작성일 10-05-24 16:15 조회 4,95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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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이야기 -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에서 담배 ‘YSL’ 인지도는 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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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이너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에 이름을 올릴만한 사람 모두가 자기만이 적격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생로랑의 위대성도 주관적인 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캘빈 클라인과 랄프로랜, 홀스턴이 있기 전에 입생로랑이 있었다. 입생로랑이 아니었다면 다른 디자이너들은 현재 요식업계에 종사하고 있을지 모른다. 입생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브랜디 명으로 내세운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역할, 곧 명성을 백화점 매출로 재생하는 방법을 창출한 인물이다.……”

이는 1997년 1월 15일 발행한「뉴스위크」에서 재리 애틀러 기자가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입셍로랑을 평가 한 기사의 일부입니다.

입생로랑은 19살 때인 1955년 디오르 패션 스튜디오에 입사했습니다. 디오르 패션은 '뉴룩(New Look)을 통해 패션의 혁명을 창조했다'는 크리스찬 디오르가 설립한 회사입니다. 입사 2년만에 디오르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수석 디자이너까지 오르고, 1957년 10월 디오르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디오르 2세가 되어서 회사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58년 1월 처음 컬렉션을 개최해서 트라페즈 라인(trapeze line)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어깨 폭이 좁고 A자처럼 자락이 넓은 스타일로서 슈미즈 드레스의 변형에 불과했으나, 바닥에서 50cm 올라간 치마단이 젊은 룩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면서 전문가들이 찬사를 보내자 언론들이 크게 주목했습니다.

1962년 입생로랑은 디오르 패션과 결별하고 리브고슈 뷰티크란 회사를 설립해서 고급 의상실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값싼 기성복 패션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고급품의 대량 생산과 유명인을 내세운 판매 전략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입생로랑의 성공은 1960년대 경제 성장과 영파워의 등장,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가능케 한 사회적 발전과 함께 전통적인 성도덕의 해체가 배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대적 유행이었던 히피 문화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의 바지 착용이나 가슴이 드러나는 상의를 입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입생로랑은 '여성이 입어도 되는 것', '여성이 입으면 안 되는 것'식으로 존재했던 일종의 우상을 일거에 타파했습니다. 또한 모델도 다양한 인종을 참가시켰으며 남녀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등 기존의 미(美)의식을 새롭게 정의 하는 파격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입생로랑이 서구 문화에서 패션 개념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1971년 1월 파리 패션계의 또 다른 상징인 코코샤넬이 사망하자 입생로랑은 거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피에르 가르뎅(Pirre cardin)은 브랜드 사업에 치중하고 있어서 상표 팔기에 여념이 없었고 지방시(Givenchy)는 대중성이 결여된 활동을 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패션에만 열중인 입생로랑이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입생로랑은 마케팅 방식에서도 특별했는데, 언론 보도를 이용한 홍보 기법은 기발했습니다.

1971년 35세 때 자신의 이름이 박힌 남성용 향수광고에 누드로 출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광고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동성애를 표현한 것으로 언론이 대대적인 논란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 밖의 브랜드로 paris는 파리시의회, opium는 반 마약단체와 중국 화교, champagne은 포도재배 농민들의 반대 시위로 기사화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현재 YSL로 대표되는 입생로랑의 품목은 의류는 물론 수건, 볼펜, 셔츠에서부터 선글라스, 핸드백, 담배에 이르기까지 모두 2백여개나 됩니다. YSL이라는 이름 자체가 파리적 우아함의 추상화 된 이미지의 상징처럼 표현되고 프랑스라는 기호와 연결되는 시너지 효과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파리패션하면 사족을 못 쓰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한국에서도 YSL이란 상표는 다른 것에 비해서 성공한 명품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의 담배는 인지도가 희박합니다. 유명 브랜드 제품이라면 무조건 사고 보자는 풍토에서 보면 진짜로 의아합니다. '최상위 1%의 구매력은 점유율이 아니라 브랜드의 가치가 좌우한다'는 말처럼 그들의 숫자가 적어서 담배 시장에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17세기 루이 14세 때 재상이었던 장 밥티스트 콜베르가 “패션을 통한 세계 정복”을 외치면서 국가 정책 사업으로 키웠던 것이 현재 프랑스의 패션입니다. 패션의 민감도와 정열하면 한국 국민도 세계 최고 수준에서 결코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산업은 굴뚝이 아니라 지식 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 성패는 국민적 관심도에서 비롯된다고 보면 한국은 이미 출발점을 넘어섰으므로 밝은 미래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YSL!

현재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우리가 뛰어 넘어야 할 가장 첫 번째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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